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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비즈] LIC현대 케니 박 대표…"한국차 팔며 모국애 키운다"

낮엔 자동차 딜러에서 차를 닦고, 밤엔 클럽에서 드럼을 치던 시절. 11살 때 미국에 온 한인 1.5세 청년에게 자동차 세일즈맨이란 직업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10여년간 기른 긴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 생애 처음으로 양복을 입고 출근한 이후 27년이 지났다. 세차맨이었던 청년은 세일즈맨을 거쳐 이제 자동차딜러의 공동 대표가 됐다.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LIC현대 케니 박 공동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지난 27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이제 현대자동차 알리기에 앞장 설 수 있어 자랑스럽다”면서 “앞으로 현대·기아차 딜러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밝혔다. ◆자동차 업계 입문=1984년 스물 다섯 살 때다. 버지니아에 있는 딜러에서 차를 닦다가 세일즈맨을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니저를 찾아가 세일즈맨을 시켜달라고 했다. 매니저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음악을 하던 때라 머리가 길었다.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머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출근했다. 매니저는 그의 열정에 감동, 세일즈맨 자리를 맡겼다. 뛰어난 이중언어 구사능력과 남다른 마케팅 방법, 그만의 친화력은 실적으로 이어졌다. 88년엔 한 달에 74대를 판 적도 있다. 결국 그 해 포드 세일즈맨 전국 4위에 이름을 올렸다. ◆뉴욕서도 승승장구=93년 뉴욕으로 이주, 맨해튼에서 파트너와 함께 리스전문 포탐킨 자동차 간판을 내걸었다. 뉴욕의 화려함과 더불어 박 사장의 인생도 승승장구였지만 2001년 9·11 참사가 터졌다. 맨해튼 자동차 시장의 하향세로 이어졌다. 2002년 사업을 정리하고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초대형 딜러 메이저 자동차로 자리를 옮겼다. 한 달에 딜러십 전체에서 1200대를 팔 정도로 규모가 큰 딜러였다. 박 대표는 아시안부서 사장을 맡아 10명의 직원을 진두 지휘하며 매출을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돈도 많이 벌었다. ◆넘어졌던 순간=부동산 경기가 한창이던 2006년 말 잠시 자동차 업계를 떠나 건축회사를 설립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모르는 일은 시작하는 게 아니었다. 배우면서 한다는 것, 말처럼 쉽지 않았다. 사업은 나아지지 않았고 서브프라임 파동에 금융위기까지 터졌다. 직격탄이었다. “쫄딱 망했다. 동전을 모아 걸어서 주유소에 가서 담배를 사야 했다. 20년 넘게 자동차를 팔던 사람이 담배 사러 갈 돈도, 차도 없었다.” ◆다시 일어선 지금=그렇게 주저앉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자동차 업계에서 넘어진 적은 없었다. 20여년 전처럼 다시 양복을 차려 입고 지금의 LIC현대의 문을 두드렸다. 어느 정도 규모도 있는 딜러에서 다시 승부를 보고 싶었다. 대표를 만나 이름을 밝히고 파트너를 하자고 했다. 26년전 세차맨이 매니저를 찾아가 세일즈맨을 시켜달라고 할 때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소리였다. 그래도 그 때와 달랐다. 20여년간 업계에서 쌓아온 명성이 있었다. 현대자동차 딜러라 한인인 자신에게 승산이 있어 보였다.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현대차를 더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대차 딜러에 세일즈맨으로 취직했다. 10일간 18대쯤 팔았을까. LIC오토클럽에서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하자고 했다. 지난해 5월부터 다시 ‘대표 케니 박’이란 명함이 생겼다. 결국 20여년 간의 경험과 건축업 실패 덕분에 한국차가 미국 속에서 뻗어 나가는 데 힘을 보탤 수 있게 됐다. LIC현대도 박 대표를 중심으로 한 아시안부서가 생긴 뒤 전체 판매량이 30% 가량 늘었다. 박 대표는 “현대차를 팔면서 모국애가 커졌다”면서 “한인 1.5세, 2세들이 한국과 한국 상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더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 자동차를 선호할 수 있도록 한국차 알리기에 앞장 설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2011-03-29

[피플@비즈] 로랜드 노말선 대표…창업 25주년 '위기는 기회' 강조

고급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로랜드’의 노말선 대표가 지난 4일 뉴욕을 방문했다. 뉴욕·뉴저지 지역에서 활동하는 방문판매 컨설턴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다. 본사가 LA에 있는 까닭에 동부지역에 있는 컨설턴트들이 최신 정보에 뒤쳐지지 않도록 대표가 직접 뉴욕을 찾아와 정기 모임을 열었다. 4일 뉴저지주 티넥 메리엇 호텔에서 열린 컨설턴트 모임에서 노 대표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에 대해서 강조했다. 그는 “로랜드는 25년 전 LA에서 창업한 이래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는 회사’로 성장해 왔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또 “독일제품인 휘슬러 냄비와 고급 거위털 이불 등을 시작으로 우수한 품질의 생활용품을 한인사회에 판매해 왔다. 3년 전부터는 홀세일 업계에 진출, 아마존·윌리엄 소노마·니먼 마커스에 입점하는 등 휘슬러의 주류 시장 공략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로랜드의 주류 진출엔 그의 딸인 프랜시스 노 부사장의 공이 컸다고 한다. 2세인 프랜시스는 아버지의 사업을 한 단계 발전시켜 주류 진출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것. 덕분에 일본에서 만든 친환경 수세미 ‘굿바이 세제(Goodbye Detergent)’는 LA현대미술관(MOCA)·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유명 박물관 기념품숍에 입점하기도 했다. 노 대표는 “경기침체로 위기가 닥쳤지만 우수한 상품으로 주류시장을 뚫은 덕분에 홀세일 분야 매출은 지난 1년 새 4배나 성장했다”며 “오는 4월부터는 로랜드 홈페이지를 통해 제품과 지역 컨설턴트를 소개해주는 등 전자상거래 분야도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위기가 닥쳤을 때라도 열의를 가지고 자기가 설 자리를 찾아보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며 “비즈니스 성공을 위해선 조급하게 서둘지 말고 토대를 잘 닦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2011-03-07

[피플@비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벡…"한국 패션 뉴욕 진출 도울 것"

뉴욕 패션계 네트워크를 꽉 잡고 있는 한인 젊은이가 있다. 광고기획사인 ‘립맨’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하고 있는 조 벡(32·본명 조엘 킴벡). 한인 3세인 그가 미국식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김씨인 할아버지와 백씨인 할머니가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두 성을 합쳐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벡은 뉴욕의 유명 광고기획회사인 베런&베런·마크도프만 컴퍼니를 거치며 캘빈 클라인·휴고 보스 등의 광고를 기획했고, 지금 다니는 립맨에서는 저스트카발디·라프시몬스 등의 광고 제작에 참여했다. 각 브랜드에서 광고할 시즌 콜렉션을 분석, 콘셉트를 정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또 포토그래퍼·그래픽 디자이너 등 제작진을 직접 섭외하고 있어 패션계 네트워크에 정통하다. 그는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영국·일본·한국 언론사에 칼럼을 주기적으로 쓰고 있다. “한국에서는 패션계 지망생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히 부족합니다. 디자이너뿐 아니라 패션계의 다양한 직종을 소개하는 등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시야를 넓혀주고 싶습니다.” 벡은 한국 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고려대)를 졸업,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을 거쳐 뉴욕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한국 패션 콘텐트가 뉴욕에 진출하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 디자이너 해외 진출 프로젝트인 ‘컨셉 코리아’의 컨설턴트를 맡고 있는 것. 지난 9월 개최된 뉴욕패션위크 컨셉 코리아 행사와 관련된 스태프·초청인사들을 직접 섭외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패션에 관심을 갖고 투자하고 있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에 한국 패션의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해 기쁩니다.” 한국 패션 콘텐트의 뉴욕 진출에 대한 의견도 덧붙였다. “한국적인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 패션을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시키고자 한다면, 현지 전문가들이 이해하도록 이곳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어야 해요. 현지 상황에 정통한 PR회사 등 스태프와 협업하는 것이 최적의 현지화 전략입니다.” 벡은 한국 월간지에 연재 중인 칼럼을 모아 곧 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그의 칼럼은 블로그(blog.naver.com/uplifter)에서 볼 수 있다. 양영웅 인턴기자 jmhero@koreadaily.com

2010-12-20

[피플@비즈] "실력은 기본…협동심 길러야"

“패션 센스보다 새로운 디자인 방향을 조율하는 소통의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 유명 패션 브랜드 ‘아르마니 익스체인지’에서 여성의류 디자인팀장으로 활동하는 수잔 이씨. 그는 여성복 디자인 기획을 제품에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중책을 맡아 젊은이의 패션을 이끌어가고 있다. 이씨는 “패션업계를 선도하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회장의 철학을 따르면서 젊은이의 트렌드를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며 “회사가 제시하는 비전과 테마에 맞춰 디자인 방향을 조율하는 소통 능력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아르마니 익스체인지는 명품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5개 패션라인 가운데 하나로, 젊은층을 겨냥해 트렌디하면서 고품질을 추구하는 브랜드로 통한다. 이 팀장은 여성의류 디자이너 5명의 패션 방향을 제시하고 총괄한다. 또 마케팅·판매·제작 부서의 의견을 반영해 전체적인 제작과정을 조율하기도 한다. 팀장으로 디자이너도 직접 뽑는다. 실력은 기본이고 창의적인 생각과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수 있는 마인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패션산업에 유용한 전문 기술을 익히기 위해 지난 1996년 파슨스 패션스쿨에 입학했다. 졸업 후 랄프로렌·DKNY를 거쳐 2003년 아르마니 익스체인지 디자이너로 발탁됐다. 뛰어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입사 4년 만에 팀장이 됐다. 패션 디자이너가 넘치는 뉴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변화에 신속히 대처하는 자기만의 노하우를 찾았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나타내지 않으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말이 많으면 부정적 이미지로 비춰지는 한국의 직장 문화를 벗어나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우선 실력을 갖추는 것이 먼저지요.” 이씨는 젊은층의 패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네트워크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젊은 한인 디자이너 모임인 ‘D2(Design of 2nd Generation)’ 회원들과 매주 만나 패션 트렌드를 분석한다. 그는 “한인 패션 지망생들이 문화적 차이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아르마니 그룹은 디자이너와 경영인을 동급으로 취급한다”면서 “디자인과 경영 업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경영진이 되겠다”고 포부를 말했다. 양영웅 인턴기자 jmhero@koreadaily.com

2010-12-15

[피플@비즈] 한·미 잇는 광고시장 개척

한인기업이 미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새로운 온라인 광고시장을 개척, 화제가 되고 있다. 뉴저지주 온라인 광고회사 ‘애드마루네트워크(www.admaru.com)’는 미국에서 한국의 포털사이트나 주요 언론사 웹사이트에 접속할 경우 미국회사 배너가 뜨면서 광고 효과를 누리는 이른바 'IP 타깃' 방식을 도입했다. 현재 포털사이트 다음과 중앙일보 조인스msn·조선닷컴·동아닷컴 등 주요 언론사 웹사이트를 통해 버라이즌·로우스·PNC뱅크 등 10여 개 배너 광고를 하고 있다. 이진규·양수석 공동 대표는 “한국의 웹사이트를 볼 때마다 미주 한인과 상관없는 한국 광고가 나오는데 이는 100% 버려진 공간”이라고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또 “이 공간을 활용해 미국 업체에는 새로운 광고시장을 열고, 한국 매체에는 온라인 광고를 수출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애드마루는 미국의 대형기업이 활용하는 온라인 배너광고 대신 일반 한인들도 활용할 수 있는 ‘온라인 키워드’ 광고시장도 공략하고 있다. 디스플레이 그래픽 광고 대신 텍스트 문자 위주의 광고로 효과를 얻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식당이나 변호사·의사 등도 한국의 주요 웹사이트를 통해 문자 광고를 할 수 있도록 마케팅 공간을 확대하고 있는 것. 애드마루는 이를 위해 최근 구글과 파트너십을 맺기도 했다.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MBA) 와튼스쿨을 졸업한 이 대표는 앞서 한글 모기지 정보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올웨이즈닷컴’을 운영하기도 했다. 파트너 겸 기술책임을 맡고 있는 양 대표는 아주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2006년 미국에 왔다. 이들은 새로운 온라인 광고시장을 열 목적으로 의기투합해 지난해 애드마루를 설립했다. 551-795-4518. 이중구 기자 jaylee2@koreadaily.com

2010-11-19

[피플@비즈] 입문 3년 만에 패션계 '주목'

“뉴욕은 한인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기회의 장입니다.” 라스베이버스·뉴욕·파리 돌며 유명 트레이드쇼서 콜렉션 소개 17일 라스베이거스를 시작으로 뉴욕(9월)과 파리(10월)에서 잇따라 유명 의류 트레이드쇼 ‘캡슐쇼(Capsule Show)’에 의류브랜드 ‘SHIN’ 가을 콜렉션을 선보이는 윤신원씨. 윤씨는 유럽 유명 디자이너 씨네온·피터 젠슨 등과 함께 이 트레이드쇼에 참여한다. 윤씨가 SHIN을 런칭한 지 1년반 만의 일이다. SHIN은 같은 옷이라도 다양한 형태로 연출해 입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같은 스타일이 의류 바이어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아 미국과 캐나다는 물론, 이탈리아·핀란드의 유명 의류숍에 입점했다. 지난 6월엔 한국 갤러리아 백화점의 ‘스티븐 알렝’ 매장 내 유망 디자이너 콜렉션에 한인으로는 처음 진출했다. 윤씨는 한국에서 일하던 건축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에 와 FIT에서 1년 공부한 것 외에는 특별히 패션 관련 수업을 받은 것이 없었다. 그런 윤씨가 2007년 젠 아트(Gen art) 그룹 선정 유망 디자이너에 뽑힌 후 2009년 초 SHIN을 런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리하게 사업을 크게 시작하지 않고 내가 감당할 만큼의 소규모 라인업을 준비했다”며 “한 가지 소재와 화이트·블랙 색상을 쓰되 디자인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윤씨가 패션계에 입문했던 2007~2008년은 패션 경기가 좋지 않았다. 그는 이때 유행을 쫓지 않고 한정된 수량과 라인업을 공급하는 디자이너 콜렉션 의류를 추구했다. 윤씨는 또 의류 스케치 후 주요업무를 전문 재봉사와 공장에 맡기는 패션디자이너들과 달리 본인이 모든 제조 공정을 주도한다. 그는 “원하는 스타일을 연출하기 위해 재봉사와 수시로 이야기하고 피팅모델도 내가 직접 한다”고 말했다. 그는 “뉴욕에서 한인 패션 디자이너들의 위상이 높고 인적 네트워크도 잘 구축돼 있다”며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고 강조했다. 양영웅 인턴기자 jmhero@koreadaily.com

2010-08-16

[피플@비즈] 유대인·이탈리안 아성 뚫고, 한인 최초로 풀턴 시장 입성

직원 23명에 5천만불 매출 목표 "100년 이상 된 업체들 능가할 것" 유대인과 이탈리안이 장악하고 있는 브롱스 뉴풀턴피시마켓. 이 곳에서 이세훈(58·사진) 사장은 40여 도매상 중 유일한 한인업체인 ‘캡틴블루’를 2년째 운영해 오고 있다. 뉴욕시 수산물 도매시장 역사상 한인이 도매상을 단독 운영하는 것은 그가 처음이다. 아시안이 도매상을 운영하기는 쉽지 않다. 오랜 경력과 신원조회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엄격한 심사뿐만 아니라 업계를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과 이탈리안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견제도 만만찮다. 이들은 기존 도매업체가 매물로 나오면 다른 민족이 사지 못하게 서둘러 매입해 버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장은 “수산물 바이어는 도매상을 하는 게 꿈이지만 아시안은 감히 들어오려고 마음을 못 먹을 정도로 장벽이 높다”고 말했다. 창업 비용만 수백만달러에 이른다. 이 사장도 10년의 오랜 준비 끝에 어렵게 도매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현재 23명의 직원들을 거느리고 있는 캡틴블루의 올해 매출 목표는 5000여만달러. 캡틴블루가 취급하는 어종은 50여가지로 1주일에 60만파운드의 수산물을 거래한다. 이 사장은 “수산물 도매업은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해야 하는 만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밤 12시에 출근해 다음 날 정오가 돼서야 퇴근한다. 바이어일 때는 하루 20시간씩 일하는 것은 예사였다. 따라서 고생할 각오와 열정이 없으면 견디기 힘들다. 이 사장은 1987년 미국으로 이민왔다. 당시 수산물 배달직원을 구하는 구인광고를 보고 지원한 것이 인연이 돼 발을 들여놓게 됐다. 대부분 사람은 냄새 나고 힘든 일이라 기피했지만 이 사장은 ‘이게 바로 천직’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생선 냄새가 너무 좋고 틀에 박힌 일보다는 땀 흘리며 일하는 직업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100년 이상 영업해 오고 있는 기존 도매상과의 경쟁에서 이겨 시장 내 최고 도매상이 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인 소매업자들에게 보다 싼 가격으로 싱싱한 수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권택준 기자 tckwon@koreadaily.com

2010-08-13

[피플@비즈] 랄프 로렌 제품 개발 디렉터 김소희씨, "성공 비결은 꿈과 도전 정신"

“꿈과 열정이 있으면 길은 반드시 열리기 마련이죠.” 세계적인 패션업체 랄프 로렌의 ‘럭비(Rugby)’ 브랜드에서 제품 개발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김소희씨. 4일 맨해튼 사무실에서 만난 김씨는 한인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 미국 패션업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나는 영어가 짧아서’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등의 소극적인 생각을 버리고 일단 도전할 것을 강조했다. 아직도 백인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 패션업계에서 김씨가 디렉터까지 오르게 된 데에도 이런 도전 정신이 큰 역할을 했다. 김씨가 패션업계에 종사한 지는 20여년으로 그동안 앤 테일러, 리미티드, 세인트 존스 등 유명 패션업체에서 디자이너를 거쳤다. 김씨의 손을 거쳐 시장에 나오는 신제품은 연간 500~600가지에 달한다. 전국에 11개 직영매장을 둔 럭비는 10대 후반~20대 후반의 젊은층을 타깃으로 하며, 미국 프렙스쿨 복장이 컨셉이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김씨는 같은 분야를 공부하러 미국으로 유학왔으나 1년 만에 집어치우고 평소 하고 싶었던 패션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오하이오주 ‘컬럼버스 칼리지 오브 아트 앤 디자인(CCAD)’에서 광고와 패션디자인을 공부한 김씨는 졸업 후 직장을 구하기 위해 전화번호부를 가져다 놓고 패션회사마다 일일히 전화를 걸었다. 그러다 한 회사에 운 좋게 채용이 됐고, 그때부터 디자이너로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패션업계에 발을 디딘 김씨의 생활은 한 마디로 ‘전쟁’이었다. 미숙한 영어와 소수민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열심히 하는 길밖에 없었다. 김씨는 “처음 5~6년 동안은 회사에서 가장 늦게 퇴근할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고 그 결과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상사가 맡긴 일은 두 번 묻지 않을 정도로 제 시간 안에 깔끔하게 처리해냈다. 언어적인 문제로 힘들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럴 때일수록 이를 악물고 악바리처럼 일했다. 김씨는 “미국인들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능력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며 “미국 패션업계에서 한인 디자이너들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 사고 방식으로 도전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권택준 기자 tckwon@koreadaily.com

2010-08-05

[피플@비즈] ‘프레드릭 페카이’ 헤어스타일리스트 브랜든 신씨

“재능을 함께 나누는 헤어스타일리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맨해튼 5애브뉴, 56스트릿 헨리벤델 백화점 내 유명 미용실 ‘프레드릭 페카이(Frederic Fekkai)’ 본점의 헤어스타일리스트인 브랜든 신(34)씨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미용인의 꿈을 키우고 있다.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와 한 분야에 ‘올인’한 덕분에 지금은 다른 미용사들의 교육을 담당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프레드릭 페카이는 뉴욕·캘리포니아·플로리다 등지에 7곳의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결혼식을 올린 첼시 클린턴의 머리도 이 회사의 작품이다. 본점 직원만 100여명. 이 중에서 헤어컷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은 신씨를 포함해 모두 4명이다. 프레드릭 페카이는 미용사의 실력에 따라 125~205달러의 헤어컷 요금을 부과한다. 신씨가 받는 요금은 프레데릭 페카이에서 두 번째로 비싼 185달러다. 신씨는 “체계적으로 기술을 배우고 싶어 미국 미용업계를 노크했다”며 “힘은 들었지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단골 고객으로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출연한 앤 헤서웨이, 모델 몰리 심스, 중국계 스타 피아니스트 랑랑 등이 있다. 19살 때 미국에 온 신씨는 1년 후부터 미용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김선영 미용실에서 기술을 익힌 후 1999년 한인으로는 처음 프레드릭 페카이에 입사했다. 부모의 반대와 언어 장벽 등 어려움이 컸지만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오기로 견뎌냈다. 처음 2년 동안은 영어가 서툴러 말이 없는 사람으로 통할 정도였다. 하지만 실력을 인정한 프레드릭 페카이 원장이 그를 보조로 선택하면서 남보다 빨리 탄탄한 실력을 다지게 됐다. 신씨는 “몇번 오지 않는 기회에 실수 없이 일을 한 것이 보조로 발탁된 계기가 된 것 같다”며 “운이 좋았”고 말했다. 좀 더 많은 한인 미용인들이 자신감을 갖고 미국시장에 진출했으면 한다는 그의 꿈은 자신의 이름을 건 미용실을 운영하는 것이다. 신씨는 “늦어도 5년 후에는 시작할 계획”이라며 “당당히 내 이름을 건 살롱에서 훌륭한 후배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는 날이 오기 바란다”고 말했다. 최희숙 기자 hs_ny@koreadaily.com

2010-08-04

[피플@비즈] 맨해튼 김선영 미용실 리사 김 원장…직원들에 경영 가르쳐 창업 지원

맨해튼 32스트릿에 있는 김선영 미용실. 한인타운에 자리를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민족 고객이 80%에 이른다. 비결은 무엇일까. 지난 19일 한미미용인연합회 세미나에서 후배 미용인들에게 경영 노하우를 전수한 리사 김(65) 원장을 24일 미용실에서 따로 만나 못 다한 얘기들을 들어 봤다. 올해로 개업 20주년을 맞은 맨해튼 김선영 미용실의 강점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운영 시스템이다. 헤어컷 스타일을 패턴화해 사용하고, 서비스 전 상담을 통해 고객의 스타일을 찾아 준다. 바로 이 점이 타민족 고객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게 김 원장의 설명이다. 직원 교육에도 각별히 공을 들인다. 김 원장은 “전문성을 갖출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옷차림에서부터 뮤지컬 관람 등 문화적 소양을 기르는 일까지 챙긴다”고 말했다. 또 미국 미용업체 관계자들과 만날 때 직원과 함께 가거나 각종 세미나에 참석시켜 최신 유행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선영 미용실의 직원은 파트타임을 포함해 25명. 개업 당시의 5배에 달한다. 그는 ‘뻔뻔함’과 ‘적극성’을 성공 요인으로 꼽는다. 어려운 고비가 있을 때마다 기죽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왔다는 것이다. 개업 초기 위기감을 느낀 김 원장은 미국 미용업계에 손을 내밀었다. 김선영 미용실을 알리기 위해 필요 이상의 제품을 사면서 회사들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들 기업이 제공하는 교육에 적극 참여하며 업계 정보와 기술을 습득한 후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직원 교육에 활용해 왔다. 김 원장은 “영어가 유창하지 못해 미국업체 관계자들과 얘기를 하다가도 막히면 바로 말을 막고 비서를 불러 통역을 시키며 묻고 싶은 질문을 하고 답을 얻는다”고 밝혔다. 지난해 경기 침체로 다시 한 번 위기감을 느낀 그는 대부분 등한시하는 남자 헤어컷 패턴을 구축해 재미를 보기도 했다. 김 원장의 꿈은 세계 패션의 수도인 뉴욕 곳곳에 김선영 미용실 간판을 내거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경력 7년 이상 직원들도 창업반을 운영하면서 독립을 돕고 있다. 자금 관리 등 경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알려 준다. 현재 베이사이드와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에 있는 김선영 미용실이 창업반의 결실이다. 김선영 미용실은 김 원장의 큰 언니인 김선영씨가 1957년 한국 명동에서 창업했으며, 현재 청담동에 본점을 두고 세계 50여곳에 직영점과 체인점을 운영 중이다. 최희숙 기자 hs_ny@koreadaily.com

2010-07-26

[피플@비즈] “실패를 두려워 마세요”…

"열심히 일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고위직에 오르려면 원하는 분야에 대한 이해를 쌓고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합니다.” 지난달 30일 열린 아시안여성경제인협회 리더십 컨퍼런스에 패널리스트로 참석한 씨티그룹 프라이빗뱅크 법률팀장(General Counsel) 밀리 김(49·사진)씨는 무슨 일에든 실패를 두려워 말고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했다. 씨티그룹 법률팀 서열 3위인 김씨는 아시안 여성으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있다. 아시아·유럽 등 세계 지사를 포함해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변호사는 45명. 언젠가는 최고의 자리인 씨티그룹 총괄 고문 변호사(General Counsel of Citigroup)로 올라갈 수 있는 위치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인 그는 웰슬리대에서 경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씨티그룹에는 1995년 입사했다. 인수합병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법률부서에서 일을 하다 1998년부터 국제투자부문 총괄 고문 변호사로 활약해 왔으며, 4개월 전 프라이빗뱅킹 법률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항상 열정을 갖고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다는 그는 이번 부서 이동도 새로운 변화를 찾아 시도한 것이다. 성공한 변호사인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법대 재학 시절 변호사 가정 출신인 대다수 동료들과 달리 주변에 도움을 받을 수 전문가가 없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하며 대처한 덕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멘토링과 네트워킹을 적극 활용해 어려움을 극복할 것도 조언했다. 김씨는 “20여년 전에 비해 법률 분야에 진출하는 아시안은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월가에는 충분치 않다”며 “글로벌 시대를 맞아 다양성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많은 만큼 한인 2세들이 적극 도전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희숙 기자 hs_ny@koreadaily.com

2010-07-01

[피플@비즈] "아시안 센서스 결과 나오면 미국기업들 마케팅 늘릴 것”

“아시안시장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2010 센서스 결과가 나오면 미국기업들이 아시안시장에 대한 투자를 더 늘릴 것입니다.” 아시안아메리칸광고연맹 회장이자 미 최대 아시안 마케팅회사 중 하나인 IW그룹 대표를 맡고 있는 한인 2세 니타 송(42·사진)씨의 말이다. 그는 미국사회에 아시안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알리고 아시안 마케팅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달에는 연례 컨퍼런스도 개최했다. 업계 정보 교환과 평가는 물론 효과적인 타깃 마케팅을 펼친 업체와 광고 대행사를 선정해 시상식도 열었다. 송 회장은 ”아시안 인구가 꾸준히 늘면서 미국기업의 아시안 마케팅도 확대되고 있다”며“다양한 아시안 문화만큼이나 다양성을 추구하며 특정 그룹에 어필할 수 있는 광고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많은 미국기업들이 다양한 아시안 커뮤니티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인은 물론 중국·베트남계 등 커뮤니티 자체가 다양한 데다 같은 그룹 내에서도 1세대와 2세대 등 다양한 변수가 있음에도 하나의 그룹으로만 보고 접근하는 경향이 큽니다. 다양한 변수를 적용, 접근해야 하는 것이 미국기업들의 과제입니다.” 송 회장은 5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왔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저널리즘과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1990년 IW그룹에 입사하며 마케팅업계에 발을 디뎠다. 10년 만인 2000년 대표직에 오른 그는 마케팅이 ’천직‘이라고 말한다. 송 회장은 “이민자 자녀로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탓인지 한인과 아시안 커뮤니티를 미국사회에 좀더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관심을 많이 가졌다”며 “그 역할을 하기에는 아시안 소비자의 구매력과 중요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아시안 마케팅회사가 가장 적임이었다”고 설명했다. 마케팅업계에서는 여성의 부드러움이 남성의 강함보다 어필한다는 그는 “마케팅은 소비자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며 “자신감이 넘치고, 활동적인 한인 2세들이 도전해 볼 만한 의미있는 분야”라고 강조했다. 아시안아메리칸광고연맹은 전국의 내로라 하는 마케팅회사들이 모두 모이는 전미광고주협회(ANA) 컨퍼런스 후원 계획도 세우고 있다. 송 회장은 “아시안의 진정한 구매력과 가치를 미국기업들이 제대로 이해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희숙 기자 hs_ny@koreadaily.com

2010-06-04

[피플@비즈] 토마스 김 맥시건설 대표

'막일꾼’으로 건설업에 발을 들여놓은 뒤 병원·수술센터 전문 건축회사 대표로 자리잡은 한인이 있어 화제다. 주인공은 토마스 김(56·맥시건설)씨로 불경기 속에서도 수백만달러짜리 공사를 잇따라 따내 눈코뜰새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 대표를 만난 건 자정이 가까운 시각 중부 뉴저지 플로람파크 수술센터에서였다. 1년 전 시공한 센터에서 40만달러 규모의 에어컨이 고장나 이를 해결해 주기 위해 간 것이다. 현장의 유일한 아시안인 그가 10여명의 백인을 향해 이것저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케이블은 이곳에 연결하고, 공기 흐름은 이쪽으로 하는 게 좋겠어요.” 기술자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조심스럽게 작업을 이어갔다. ‘수술센터’라는 특성상 김 대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작업을 마쳐야 했기에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특히 이 센터에는 다음날 크고 작은 수술 65건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김 대표의 책임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수술만 전문으로 하는 센터의 10여개 수술실은 온도를 늘 65도로 맞춰야 합니다. 단 1도의 차이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에어컨을 써야 하고 케이블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하죠.” 김 대표는 모든 수실실 온도가 맞춰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다음날 동틀 무렵이었다. ◇막일꾼에서 병원 공사하기까지=김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병원·수술센터’ 건설 전문가다. 지금까지 뉴저지주와 펜실베이니아에서 12곳의 종합병원과 수술 전문 센터 공사를 진행했다. 필라델피아 토마스 제퍼슨 병원, 뉴저지 패스캑 밸리·홀리네임 병원 등이 그의 손길을 거쳤다. 이밖에 개인 병원도 20여곳이나 시공했다. 종합병원의 경우 대부분 진료실 등의 공사였고 수술센터는 모든 공사를 도맡아 했다. 공사비는 300만~900만달러. 기간은 보통 1~2년이다. 그가 처음부터 병원 건축 전문가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설’의 ‘건’자도 모르는 초자였다. 컴퓨터 관련 일을 하던 김 대표가 미국에 온 건 1985년. 전공 관련 공부를 더 하려던 김씨는 여느 유학생과 같이 수퍼마켓, 음식점 등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필라델피아 기차역사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야말로 ‘노가다’였다 수년간 현장에서 일을 배우던 그는 1991년 독립을 선언했다. “일을 할 때도 단순 기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업가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했어요. 물건은 어디서 들여오고 인부들은 어떻게 부리고…. 언젠가 독립을 생각했던 것이죠.” 그의 전략은 우선 기차역사 집중 공략. 이 전략이 먹혀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펜실베니아 기차역사 소매점 공사를 맡아 했다. 하지만 1997년 대형 교통사고로 은퇴 기로에 놓이고 말았다. 새로운 기회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필라델피아 토마스 제퍼슨 병원 앞에 아내가 운영하던 꽃가게를 찾은 병원 관계자에게 병원 공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자 공사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진심은 어디서나 통한다=막막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이후 그의 ‘성실함’과 높은 ‘완성도’는 입소문을 탔다. 김 대표는 “아무래도 병원은 민감하고 꼼꼼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게다가 한인 특유의 완벽함이 작용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한 플로람파크 수술센터에서의 일화 하나. “병원의 얼굴인 리셉션 데스크와 보호자 대기실 공사에서 결과물이 맘에 안들어 부수기를 5번이나 해 6번째 만에 완성했죠. 병원에서도 저에 대해 다시 봤다고 하더라고요.” 더불어 공사 뒤 무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큰 장점이 됐다. ◇불황 무풍지대=이 때문에 그에게는 ‘불경기’란 단어가 없다. 이제 곧 뉴저지 몬로 수술센터 시공에 들어갈 예정이며, 타주에서도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 의대에 다니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공대로 편입해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김 대표는 “운도 있었지만 병원이라는 전문분야에 성공하기 위해 주정부의 수백장짜리 건설 규정을 외우다시피 했다. 병원 전문 기술자들과도 늘 만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나눴다”고 말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아시안으로서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는 병원 건설업에 뛰어들어 무시도 당했다. 그래도 “업계에서 유일한 한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일한다”는 김 대표는 “1.5·2세들도 생소하지만 가능성이 무한한 분야에 진출하는 경우가 늘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강이종행 기자 kyjh69@koreadaily.com

2010-05-11

[피플@비즈] 조규성 동부관광 사장 “여행업계의 삼성 만들겠다”

"미국사회에서도 인정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플러싱에 본사를 둔 미 동부 최대 한인여행사 동부관광이 오는 5월 3일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21 그랜드애브뉴)에 제2 본사를 설립한다. 뉴저지 본사는 3600스퀘어피트 규모로, 30여명의 직원이 근무할 예정이다. 티케팅에 주력했던 뉴저지 지사 업무를 뉴욕 본사 수준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본사 이원화는 뉴저지 한인사회가 크게 성장한 데다 미국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뉴욕과 뉴저지에서 각각 마케팅을 펼쳐야 한다는 계산에서다. 조규성(47·사진) 사장은 “뉴저지 한인인구가 급증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오는 관광객도 뉴욕보다 저렴한 호텔이 많은 뉴저지를 선호해 고객 서비스 강화 차원에서 제2 본사를 만들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타민족 고객 유치 확대를 위해서도 여유로운 주차시설과 사무실이 필요했다”고 덧붙였다. 내년에는 뉴저지에 사옥을 짓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뉴저지 본사에는 국제부가 신설된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을 채용해 본격적으로 미국시장 공략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한국 의료관광을 주력상품으로 하면서 주변 아시아 국가의 관광상품을 만들고, 유럽·캐나다로 향하는 미국인들도 유치할 계획이다. 한국 의료관광과 관련해서는 현대아산병원·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과 계약을 맺었다. 관광가이드와 버스운전사로 시작해 설립 16년 만에 한인 여행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일군 조 사장의 경영 철학은 안전과 신용이다. 동부관광은 고객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매년 버스 한 대당 5만달러 정도의 추가 비용이 나가는 보험에 가입해 있다. 또 지금까지 한 번도 호텔이나 버스회사 등 거래업체에 대금 지급을 미룬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덕에 지금은 급할 때면 계약서도 없이 전화 한 통화로 해결되는 일이 많다. 조 사장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는 여행사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안전과 신용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부관광은 커뮤니티 지원 활동에 적극적인 기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01년 뿌리교육재단의 모국 방문과 명문대 탐방 지원을 시작으로 효도관광과 한국 소년소녀 가장 미국 연수 지원 등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매년 자선활동에 쓰는 비용이 10만달러에 달한다. 조 사장은 “9·11 참사 직후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시작한 일이 이렇게 커졌다”며 “특히 한인 2세들을 지원하는 데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동부관광은 시대의 흐름에 발빠르게 대처하며 서비스를 업그레이드시키고 사업 영역을 넓혀 왔다. 4년 전부터 나이애가라 폭포 인근에 ‘아영가든’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으며, 6개월 전부터는 독도·동해 알리기를 시작으로 맨해튼 관광버스에 LED 전광판을 부착한 영상물 광고 사업도 하고 있다. 조 사장은 “자동차하면 현대, 휴대전화하면 삼성이 꼽히듯이 여행사하면 동부관광이 한인 커뮤티니 뿐만 아니라 미국사회에서도 꼽히는 날이 왔으면 한다”며 “한인의 특기인 세심한 서비스와 가격 경쟁력을 고려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최희숙 기자 hs_ny@koreadaily.com

2010-04-29

[피플@비즈] 모자 디자이너 유지니아 김…“성공 비결은 긍정적 마인드”

한인 2세 모자 디자이너 유지니아 김(35)씨가 대형 할인매장 타깃에 모자 콜렉션을 입점시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패션계와 할리우드 스타들 사이에서 유명한 고급 모자 브랜드 ‘유지니아 김(Eugenia Kim)’이 20달러 미만의 저가형 제품을 선보인 것이다. 18일 엘름허스트 퀸즈점에서 열린 입점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씨는 “패션계에 국한됐던 내 브랜드를 더욱 폭넓은 고객층이 이용할 수 있게 돼 흥미롭다” 며 “글로벌한 유통을 가진 타깃을 통해 이름을 알릴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이날 퀸즈점에서는 반나절 만에 재고의 절반 이상이 팔릴 정도로 고객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고객들의 의상에 맞춰 모자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맨해튼에 본사를 둔 ‘유지니아 김’은 200달러가 넘는 모자와 스카프 등을 전 세계 고급 백화점·부티크에서 판매해 연 평균 200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의류체인점 ‘어반 아웃피터스(Urban Outfitters)’를 통해서도 저가형 제품을 출시하는 등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또 해외 진출 확대를 위해 한국·일본·중동·유럽·러시아 등의 유통업자들과 접촉하고 있으며, 곧 신발 브랜드도 내놓을 예정이다. 김씨는 1997년 패션지 알루어에서 실직한 후 삭발한 머리를 가리려 직접 만든 모자가 패션계 관계자의 눈에 띄어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다. "운이 좋아 기회를 잡았지만 비즈니스를 하기에는 학력과 경험 부족 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액세서리 패션사업에서 성공하려면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이너보다 홍보·사교·재정 업무를 잘하는 비즈니스우먼이 돼야 했습니다.” 김씨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긍정적 마인드’라고 말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만을 갖지 않고 열심히 해보면 언제나 해결책이 있다. 못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잘 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이라며 “긍정적인 마음을 바탕으로 매주 목표를 설정하고 점검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시간이 지난 것에 쉽게 흥미를 잃고 항상 새롭고 신선한 것을 추구한 덕분에 패션계에서 앞서갈 수 있었다. “모자 디자인은 20분 만에 끝납니다. 어떤 때는 내가 디자인한 모자라도 이틀 뒤 도착한 샘플을 보고는 컨셉을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1만여개의 모자를 디자인했다. 김씨는 현재 패션계에서 활약하는 한인 2세 디자이너들에 대해 “각종 패션 디자인 공모전 수상자 열명 중 한명은 젊은 한인 디자이너”라며 “과거 랄프 로렌 등 유대인들이 패션계를 점령했듯이 지금은 한인 디자이너들이 패션계를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인들은 피부톤 때문에 의식적으로 액세서리를 더욱 그래픽한 색감으로 꾸민다”며 한인들의 색감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한인 디자이너들은 뭐든지 예술적이면서 상업적인면의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강점”이라며 “일처리도 빨라 디자이너팀에 꼭 한인 인턴 디자이너를 고용한다”고 덧붙였다. 2001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제니퍼 로페즈가 그의 모자를 써 유명세를 탄 이후 린제이 로한과 패리스 힐튼이 찍힌 파파라치 사진에도 그의 모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미패션디자이너협회가 주는 페리 엘리스 어워드를 받았다. 양영웅 인턴기자 jmhero@koreadaily.com

2010-04-19

[피플@비즈] '북하나닷컴’ 고정희 대표…“책 구하기 힘든 심정 알고 온라인 대여점 열었지요”

중학교 국어교사 출신 ‘아줌마’가 온라인 도서대여점 대표로 변신했다. 주인공은 ‘북하나닷컴’을 운영하는 고정희(49·사진)씨. 고씨는 지난 2002년 뉴저지주로 이민오기 전까지 부산에서 23년간 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이삿짐의 상당 부분을 책이 차지했다. 미국에 와서 불편한 것 중 하나는 신간 도서를 구입해서 읽는 일. 에디슨에 거주하는 고씨는 새 책을 사기 위해 1시간 운전해 포트리까지 가야 했다. 손쉽게 책을 빌릴 수 없는 사실을 안타까워 하던 중 “그렇다면 내가 해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북하나닷컴이 생겨난 배경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책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기증한 책으로 대여를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국에서 구입한 책을 나눠 보고 싶다며 기증한 회원도 있다. 신간이나 꾸준히 인기를 모으는 스테디셀러는 도서관학을 전공한 동생이 한국에서 선별해 보내 준다. 회원들의 추천도서는 우선적으로 구입한다. 고씨는 “한국 서점이 없는 곳에 살거나 영어권 배우자와 결혼해 오랫동안 한국 책을 보지 못한 사람 등이 고마움을 표시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북하나닷컴은 월 회비 17.99~34.99달러를 내면 대여기간이나 횟수, 우송료 없이 이용할 수 있다. www.BookHana.com, 732-991-1111.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

2010-04-08

[피플@비즈] 제이슨 이 FLC 원장…병원장으로 변신한 재정전문가

제이슨 이 페이스 레이저 클리닉(The Face Laser Clinic) 원장은 올해 파이낸스 전문가에서 병원장으로 변신에 성공했다. 20년 이상 미 부동산 개발업체 등에서 파이낸스 전문가로 일해오다 지난 6월 뉴저지 잉글우드 클립스(300 실반애브뉴 301호)에 클리닉을 열었다. 이 원장은 “한국과 미국에서 노화방지(Anti-Aging) 붐이 이는 걸 보고 제대로 된 클리닉을 운영하고 싶어 2006년부터 준비기간을 거쳐 병원을 열었다”며 “제 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이라고 웃었다. 이 원장이 추구하는 FLC의 장점은 ▶팀웍과 전문성 ▶호텔급 서비스 ▶신기술 업데이트 등이다. 그는 “스티브 팰릭(성형외과), 미셸 아이크루소(피부과), 닐레이 샤(피부과) 등 각 분야 최고 전문의를 채용했고 환자를 위해 이들 세 명이 함께 진료와 시술을 고민하는 팀웍을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새로운 정보를 얻어 의사들에게 전달하고 네트워킹을 하는 것. 의학용 레이저 관련 세미나나 학회는 빠지지 않고 가서 정보를 얻는다. 다양한 민족의 환자들을 차이점을 알기 위해 싱가포르, 그리스 등 전문의들과 커넥션도 활발히 하고 있다. 보험 커버가 안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FLC는 이벤트를 통해 합리적 가격을 환자들에게 제공한다. 오는 29일 클리닉은 ‘보톡스 데이’ 행사을 열고 가격을 25% 할인해 준다. 뉴저지 포트리고교를 졸업한 1.5세인 이 원장은 연세대 경영학과와 뉴욕대(NYU) MBA를 졸업했다. 201-567-6161. 강이종행 기자 kyjh69@koreadaily.com

2009-09-24

[피플@비즈] 블루 옥센 어소시에이츠 파트너 유진 에릭 김씨…5개년 전략 프로젝트 이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고 효율적으로 정보 공유를 했으면 합니다.” 유진 에릭 김씨(34)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비롯해 사진·비디오 공유 웹사이트 ‘위키피디아 커먼스’, 영어사전 ‘위키셔내리’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위키미디아 파운데이션’(Wikimedia Foundation·이하 위키미디아)의 내실있는 성장과 사용자 확대를 위한 5개년 전략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이들 프로젝트가 사용자 참여 중심인 특성을 살려 일방적인 해결 방안 제시보다는 모든 사용자들이 참여해 더 나은 운영 방안을 모색하도록 돕는다. 지난 7월부터 팀을 이끌고 있는 김씨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로 인터넷 접속이 힘든 아프리카나 검열로 자유로운 정보 접근이 힘든 중국 등 여러 문제점들 어떻게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방향을 모색하는 일을 돕는다”고 말했다. 위키미디아는 직원이 30여명에 불과한 샌프란시스코의 비영리단체다. 위키미디아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위키피디아를 포함해 10여개. 수만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해 이뤄지고 있으며 위키피디아만도 한국어를 포함 270여개의 언어로 지원된다. 위키피디아는 현재 세계 5대 인기 웹사이트 안에 들며 매달 3억3000만명 이상이 접속해 정보를 제공하거나 내용을 수정한다. 그는 “매일 1000만명 이상이 위키미디아 프로젝트를 방문한다”며 “더 많은 사람들이 오보나 실수 없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 마련도 과제”라고 말했다. 이처럼 대대적인 ‘협력’(Collaboration) 프로젝트를 맡게 된 배경에는 그의 경력이 주효했다. 스스로가 위키피디아 참여자로 7년여동안 활동해 왔을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프로젝트에서 중요시되는 협력을 통해 더 나은 방안을 제시하는 컨설팅이 그의 본업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에서 역사학과 과학을 전공한 김씨는 200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 운영 향상 및 업무 효율 증진 등의 컨설팅을 제공하는 블루 옥센 어소시에이츠(Blue Oxen Associates)를 공동 설립했다. 미우주항공국(NASA)·중앙정보부(CIA)·세계경제포럼 등 20여 기관의 전략 수립을 도왔다. 그는 “협력의 미를 통해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희숙 기자 hs_ny@koreadaily.com

2009-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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