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비즈] LIC현대 케니 박 대표…"한국차 팔며 모국애 키운다"
낮엔 자동차 딜러에서 차를 닦고, 밤엔 클럽에서 드럼을 치던 시절. 11살 때 미국에 온 한인 1.5세 청년에게 자동차 세일즈맨이란 직업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10여년간 기른 긴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 생애 처음으로 양복을 입고 출근한 이후 27년이 지났다. 세차맨이었던 청년은 세일즈맨을 거쳐 이제 자동차딜러의 공동 대표가 됐다.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LIC현대 케니 박 공동 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지난 27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이제 현대자동차 알리기에 앞장 설 수 있어 자랑스럽다”면서 “앞으로 현대·기아차 딜러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밝혔다. ◆자동차 업계 입문=1984년 스물 다섯 살 때다. 버지니아에 있는 딜러에서 차를 닦다가 세일즈맨을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니저를 찾아가 세일즈맨을 시켜달라고 했다. 매니저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음악을 하던 때라 머리가 길었다.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머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출근했다. 매니저는 그의 열정에 감동, 세일즈맨 자리를 맡겼다. 뛰어난 이중언어 구사능력과 남다른 마케팅 방법, 그만의 친화력은 실적으로 이어졌다. 88년엔 한 달에 74대를 판 적도 있다. 결국 그 해 포드 세일즈맨 전국 4위에 이름을 올렸다. ◆뉴욕서도 승승장구=93년 뉴욕으로 이주, 맨해튼에서 파트너와 함께 리스전문 포탐킨 자동차 간판을 내걸었다. 뉴욕의 화려함과 더불어 박 사장의 인생도 승승장구였지만 2001년 9·11 참사가 터졌다. 맨해튼 자동차 시장의 하향세로 이어졌다. 2002년 사업을 정리하고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초대형 딜러 메이저 자동차로 자리를 옮겼다. 한 달에 딜러십 전체에서 1200대를 팔 정도로 규모가 큰 딜러였다. 박 대표는 아시안부서 사장을 맡아 10명의 직원을 진두 지휘하며 매출을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돈도 많이 벌었다. ◆넘어졌던 순간=부동산 경기가 한창이던 2006년 말 잠시 자동차 업계를 떠나 건축회사를 설립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모르는 일은 시작하는 게 아니었다. 배우면서 한다는 것, 말처럼 쉽지 않았다. 사업은 나아지지 않았고 서브프라임 파동에 금융위기까지 터졌다. 직격탄이었다. “쫄딱 망했다. 동전을 모아 걸어서 주유소에 가서 담배를 사야 했다. 20년 넘게 자동차를 팔던 사람이 담배 사러 갈 돈도, 차도 없었다.” ◆다시 일어선 지금=그렇게 주저앉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자동차 업계에서 넘어진 적은 없었다. 20여년 전처럼 다시 양복을 차려 입고 지금의 LIC현대의 문을 두드렸다. 어느 정도 규모도 있는 딜러에서 다시 승부를 보고 싶었다. 대표를 만나 이름을 밝히고 파트너를 하자고 했다. 26년전 세차맨이 매니저를 찾아가 세일즈맨을 시켜달라고 할 때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소리였다. 그래도 그 때와 달랐다. 20여년간 업계에서 쌓아온 명성이 있었다. 현대자동차 딜러라 한인인 자신에게 승산이 있어 보였다.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현대차를 더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대차 딜러에 세일즈맨으로 취직했다. 10일간 18대쯤 팔았을까. LIC오토클럽에서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하자고 했다. 지난해 5월부터 다시 ‘대표 케니 박’이란 명함이 생겼다. 결국 20여년 간의 경험과 건축업 실패 덕분에 한국차가 미국 속에서 뻗어 나가는 데 힘을 보탤 수 있게 됐다. LIC현대도 박 대표를 중심으로 한 아시안부서가 생긴 뒤 전체 판매량이 30% 가량 늘었다. 박 대표는 “현대차를 팔면서 모국애가 커졌다”면서 “한인 1.5세, 2세들이 한국과 한국 상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더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 자동차를 선호할 수 있도록 한국차 알리기에 앞장 설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희 기자 dhkim@koreadaily.com